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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홍수로 시 전체가 물에 잠겼던 경북 영주를 구한 박정희 대통령
1961년 7월 11일 새벽3시부터 무려 5시간 동안 영주시 일대에 약 337mm의 집중 호우가 쏟아지면서 소백산 원류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삽시간에 풍기읍 남원천을 가득 메웠다. 이어 영주읍 시가지를 감아 돌아 흐르는 노도 같은 홍수의 물길은 서천에 이르러 오전 8시쯤 구성공원 불바위 밑 북쪽 제방을 붕괴시키면서 인구 3만 2천명의 영주 시가지의 3분의 2가 완전침수 되는 등 온 시가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이른바 ‘영주 대수해’의 시작이다.
▲ 재앙의 시작, 새벽시간대 삽시간에 잠긴 영주시가지
아침밥을 준비하던 주부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가재도구를 다 버리고 노부모와 아이들을 챙겨 업고 철탄산과 구성공원으로 피신했다.
주인은 가고 없고 빈집에서 헤엄을 쳐 다니다가 지붕위에나 물에 뜬 가재도구 나무토막에 올라앉은 돼지나 닭, 개들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집을 잃고 산에 오른 주민들은 두벌 논매기가 끝난 남산들을 모조리 휩쓸어버린 곡창지대 풍작의 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영주군 수해대책본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물에 잠긴 시가지의 긴급구호를 위해 오전 9시 30분경 당시 원당천(지금은 원리로 물길을 돌렸음) 제방 둑 50m를 끊기로 하고, 긴급히 둑을 잘라 물길을 터서 남산들(지금의 영주역) 방향으로 물이 빠지도록 유도해, 4시간 30분만인 오후 2시가 지나서 물에 잠겼던 영주 시가지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영주군이 집계한 수해피해는 가옥유실 149동, 가옥전파 176동, 가옥반파 416동, 가옥침수 1천971동, 이재민 1만5천319명, 밭 매몰 70정보, 논 매몰 132정보, 전답침수 및 매몰 378정보, 재산손실 4억 원, 도로유실 3개소 800여m, 도로 파손 2개소 203m. 제방파손 1천370m, 창고 정부양곡침수 4천114석, 가축유실 1천479마리 등이었다. 인명피해는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52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 참극을 낳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 전 대통령은 대수해가 나자 7월18일 기차로 영주역에 내려 현장을 둘러보았으며, 육군대학 교장인 이성가 장군(소장)을 복구사업소장으로 파견해 수해복구공사를 펼쳤다. 박 전 대통령의 이같은 조치로 육군133공병부대 589명과 해병 제1상륙사단 장병 137명이 긴급 투입돼 9개월간 피땀을 흘린 끝에 62년 3월31일 수해복구공사가 완료됐다.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은 수해복구공사만 아니라 당시 동구대(東龜臺)와 서구대(西龜臺) 사이를 흐르던 서천을, 훨씬 서쪽인 한절마을(가흥동) 산허리를 끊어 유로를 바꾸는 대역사를 단행해 오늘의 영주시가지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출처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42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30226.0101407302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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